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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종과 박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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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돕헤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댓글 1건 조회7,829회 작성일2006-07-13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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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종과 박래군
글쓴이 : 이계삼


가끔 김현종 생각이 난다. MBC <PD수첩> ‘한미 FTA’편을 보고난 뒤의 일이다. 그 프로그램 도입부 장면은 이렇다.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인 김현종은 자기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미국측 대표를 뒤에 세워두고 마이크 앞에 선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표정이 압권이다), 무지무지 빠르고 유창한 모국어(영어)로, ‘협상 개시’를 선언한다.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맨 앞부분 ‘투데이’ 밖에 없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인터넷에서 그의 이력을 검색해보았다.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나 ‘아이비리그’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마치고, 국제변호사로 WTO 법률자문관으로, 마흔 다섯에 일국의 운명을 쥔 통상교섭본부장까지, 정말 대단한 이력이었다.

지난 7월 10일, 밀양에서도 한미 FTA 강연회가 열렸다. 태풍이 지나간 직후여서 강연장은 썰렁했지만, 바쁜 일정을 쪼개 내려온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은 열정적으로 강의해 주었다. 나는 강연 중간에 간간이 뒤를 돌아보았다. 강연장에는 거칠한 수염의 농민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들판에서 서둘러 뒤설거지를 하고, 트럭을 타고 시내로 나와 ‘공부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는 농민회원들. 그들의 눈빛은 반짝였지만 그러나 좀이어 까딱까딱 졸고 있었다. 슬픈 장면이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고된 하루였으리라. ‘글로벌 리더’ 김현종은 그 유창한 영어로도 번역할 수 없을 이 ‘슬픔의 구체성’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가 지금 하는 일이 무역수지 계수와 법률 용어가 난무하는 ‘협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 민중들의 삶의 실체 곧 ‘피와 땀의 거래’임을 그는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박래군이라는 이가 있다. 인권운동사랑방의 상임활동가로서, 이주노동자에서부터 의문사 진상규명까지 ‘인간의 존엄’과 관계되는 모든 자리에는 그가 있었다. 에바다 농아원 사태 때 그는 비리 재단 측이 퍼부은 똥물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싸웠다.

재작년 8월, 대구 경북대에서 열린 박래군의 인권강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는 피서철의 절정이었고, 아무리 두리번거려봐도 몇 명의 주최측 사람을 제외하고 ‘청중’은 정말 나밖에 없는 자리였다. 그는 인권의 개념과 세계사적 맥락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그가 입은 바지 허벅지 안쪽 부분이 살짝 터져있는 것을. 그때 나는 박래군의 삶을,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활동가의 삶을, ‘터진 바지’로, 그날 그 외로운 강의실로, ‘한 명의 청중’을 향해 흘리는 땀방울로,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나는 월급날이면 인권운동사랑방에 조금씩 돈을 부치기 시작했다. 매달 보내오는 소식지 뒷부분 결산 자료의 ‘인건비’ 항목에는 늘 내 월급보다 약간 많은 액수가 적혀 있었다. 그 돈을 몇 명인지 모르는 상임활동가들이 나누어 쓰면서 박래군과 그의 동지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 박래군이 지난 7월 9일 구속되었다. 평택 미군기지 인근 상인들이 대추리로 향하는 평화행진단을 심하게 폭행했고, 경찰은 이를 방조했다. 그는 여기에 항의하는 집회 도중에 끌려갔다. 지난 4월 대추리 들판에서 잡혀갔다가 겨우 풀려난 지 석 달만의 일이다.

김현종과 박래군, 두 사람의 기막힌 대조를 생각한다. 미국과 FTA 맺으려고 줄을 섰던 25개국을 일거에 제낄 수 있었던 것은 김현종 그가 이른바 ‘4대 선결조건’을 들어주겠노라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언론은 전한다. 그는 이 약속도 예의 그 무지무지 유창한 모국어(영어)로 했겠지만, 이를 ‘저잣거리 한국말’로 번역하면 아마 이랬을 것 같다.

“형님, 제가 좀 살아봤는데요, 응, 우리 동네는 도대체가 후져서 못살겄어. 내가 이참에 울 동네 물 좀 확 바꿔 놓을라고. 우리 아저씨가 절 꽉 믿고 있으니, 걱정 말고 우리랑 먼저 합시다. 내 시원하게 다 들어줄게.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일이에요. 형님, 저 못 믿습니까, 예?” 아마, 이랬을 것 같다.

그 김현종을 생각하고 다시 박래군을 떠올린다. 박래군, 지난 4월 대추리 들판에서 진흙탕 속에 뒤엉켜 싸우던 박래군, 그는 또 감옥으로 갔다.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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